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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편집실

처음 만나는 집회 - 촛불문화제 속으로 들어가다

  • 황경상
  • 조회 : 23528
  • 등록일 : 2008-06-11
 

처음 만나는 집회  - 촛불문화제 속으로 들어가다


황경상, 유은실

 

※ 6.10 민주항쟁을 기념하여 연세대에서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행렬을 재현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행사에 참여한 "아고라" 사람들과 함께 연세대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행진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기자 주)

   
 
  ▲ 아고라 깃발    연세대에서 발견한 아고라 깃발 주변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 유은실
  

 “이따 현수막 좀 같이 잡아주시겠어요?”

 첫 집회참가는 얼떨결에 시작됐다.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내게도 스스럼없이 현수막을 같이 잡아줄 것을 부탁했다. 현수막에는 ‘행동하는 시민 아고라 이한열을 기억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고라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고리언’이라 불렀다.

 그들을 처음 만난 건 이한열 열사 장례행렬 재연을 준비하고 있던 연세대에서였다. ‘어, 이곳에도 아고라 깃발이 있네.’ 대여섯 명 정도가 깃발 주위에 모여 있었다. 깃발을 들고 있던 유재용 씨의 얼굴은 검게 타 있었고 팔뚝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솟아 있었다. “저 같은 경우는 직장도 그만두고 3주 동안 노숙하면서 시위에 참가했어요.”

 깃발은 자비로 만들었냐고 묻자 재용 씨는 사실 누가 만든 건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손에 손을 거쳐서 자기에게 온 것이란다. 이야기 도중에 흰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처음 보는 내게도 다가와 하나를 권했다. 그때 아이스크림 하나를 빼 물고 전동휠체어 위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말했다. “방금 뉴스에서 이명박이 재협상 타진한다고 하더라고. 오늘 사람들 많이 모인다니까 일단 흩어버리려는 속셈이지. 속아선 안 돼.” 이곳저곳에서 맞장구를 쳤다.

 이들은 연세대 총학생회 측의 부탁으로 장례 재연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했다. 연세대에서 출발해 시청 앞 광장까지 가는 행렬이다. 마침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때다. 20년 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터다. 골이 깨지고 피를 흘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잡게 된 현수막은 이한열 열사의 대형영정 바로 뒤에 따라가게 되어 있었다. 총학생회에서 나온 학생이 틈만 나면 찾아와 ‘경찰이 행렬을 막을 것 같다’고 하는 통에 긴장이 되기도 했다. 첫 집회에서 경찰과 맞부딪히는 것일까.

 정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사전집회가 있었다. ‘아고리언’ 여섯 명과 긴 현수막을 가로로 펼쳐 잡고 나란히 앉았다. 사회자가 ‘고시 철회’라고 외쳤다. 무심코 똑같이 ‘고시 철회’라고 외쳤다. 그런데 모두들 ‘협상 무효’라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완전히 초짜 티를 내고 말았다. 괴로워하고 있는 틈에 주변이 술렁였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가 온 것이다.

 사전집회에 모인 사람들보다 더 많아 보이는 취재진이 달라붙었다. 어머니는 최근에 민주운동 열사들의 희생이 헛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아직 국민들의 힘이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더 할 말이 없다는데도 취재진들은 끈질기게 어머니를 붙잡고 늘어졌다.

 집회에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과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어머니들도 참석했다. 재야운동가로 유명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사회자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자고 했다. 백기완 선생의 시에서 따온 노래였다. 노래를 아는 사람이 얼마냐 되느냐는 질문에 절반가량이 손을 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아고리언’ 박현규 씨가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안다고 답했다. 그러면 ‘광야에서’나 ‘마른잎 다시 살아나’는 아느냐고 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반백의 머리를 한 현규 씨는 그 노래들을 다 알고 있었다. 예전에 운수업에 종사하면서 노동운동에도 잠시 참여했기 때문이다. “88년에도 거리에 나왔었어. 그 때 이한열이가 10m 앞에서 최루탄을 맞았지.” 그는 학생들이 경찰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회자는 계속해서 주변 연세대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잠시 구경하다가 지나갔다. 한 경영대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 참여율이 저조한 거예요. 내일 모레 저도 경영수학 시험이 있어서.”

 사전집회가 마무리될 즈음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의 발언이 있었다. “한열이가 죽을 때 ‘엄마’라고 한 번은 했을 것 같은데, 그런 얘기를 내게 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금은 섭섭했습니다. 한열이는 죽을 때도 ‘시청 가야 되는데’라고 말했답니다. 20년이 지나도록 시청에 가질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후배 여러분 덕택으로 시청에 가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숙연해진 분위기로 하나 둘씩 일어나 장례행렬을 만들었다.

 
 
 ▲ 현수막    사람들과 현수막을 들고 정문을 나서기 직전           ⓒ 유은실 
 

 정문을 벗어난 행렬은 잠시 주춤했다. 다행히 경찰은 폴리스라인을 형성해서 찻길 한 차선을 터주고 있었다. 나는 현수막의 왼쪽 끝을 잡고 걸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주장범 씨는 앳돼 보이는데도 현수막이 나아가는 속도와 앞 사람과의 거리를 앞장서서 조절했다. “형, 깃발 흔들지 마요. 장례 행렬 재연이잖아요.” 아고라 깃발을 들고 앞장서 걷던 재용 씨가 움찔했다.

 장범 씨는 스무 살의 재수생이었다. 친구들이랑 술자리 약속이 있어 나갔다가 우연히 시위행렬을 마주쳤다고 했다. “이 상황에서 도저히 술 마셔서는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 때부터 집회에 참가해 열흘 쯤 됐다고 했다. 매일 1~2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70kg이던 몸무게가 열흘 만에 66kg가 되었다. 경찰의 물대포도 몇 번씩이나 맞았단다.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자 도리어 그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헉헉대는 나를 불쌍하게 쳐다봤다. “제가 예전에 배드민턴 선수를 좀 해서 체력은 괜찮아요.” 눈빛과 말투는 단단해 보였다.

 행렬이 이대역을 거치면서 이화여대·서강대 학생들이 합류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에 놀라고 있을 즈음 장범 씨가 킥킥 웃는다. “저거 봐요. 경찰들이 들고 서 있는 끈에 ‘수사 중 출입금지’라고 적혀있어요. 여기도 수사 중인가?” 그는 엉뚱하다가도 진지했다. “대운하 건설 말이에요. 그거 국민들이 자연을 누릴 권리를 파괴하는 거 아닌가요?” 작년에 투표권이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는 장범 씨는 “집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서 이명박 찍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고 말했다.

 날씨는 더웠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옆 차선에서 차창을 열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는 일도 그 만큼이나 무거웠다. 어떤 운전자는 ‘기름이 다 떨어지게 생겼다’며 빨리 차를 빼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 버스기사는 행렬을 보호하려고 길을 막아 선 학생들을 향해 차를 조금씩 전전시킨다거나 경적을 과도하게 울리는 것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육교 위나 인도에서 손을 흔들며 같이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같이 걷는 연세대 학생들의 풍물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제가 들어드릴게요.” 작은 목소리는 하마터면 묻힐 뻔 했다. 스물여덟 살의 김종학 씨. 그는 장범 씨가 메고 있던 확성기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종학 씨는 회사가 을지로라 간간히 나오다가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탄핵반대 시위 이후로 처음 참가하는 집회였다. 그럼에도 그는 능숙하게 구호를 외치며 나아갔다. 종근당 건물 앞에서 대열은 잠시 멈추고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도 가방에서 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 장례 행렬  아현동 근처를 지나는 행렬의 선두   ⓒ 유은실
 

 대열은 서소문을 지나 철길 위를 통과했다. 기차 한 대가 밑으로 지나갔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철도노조에서는 경적 한 번 안 울려주나?” 그러는 사이 저 멀리 중앙일보 사옥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폐간하라!” 작게 시작된 구호소리가 점점 커졌다. 사옥 앞을 지나가면서 그 목소리는 절정에 달했고 노골적으로 손가락 욕을 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옥의 유리창 안으로 대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일보 폐간하라’처럼 항상 구호소리가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사전집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여학생이 몇몇 구호를 외치자고 말하긴 했지만 앞과 뒤에서 구호 소리는 제각기 달랐다. ‘고시철회 협상무효’, ‘이명박은 물러가라’, ‘함께해요 민주시민’ 등의 목소리가 동시에 산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드디어 시청 앞 광장 어귀에 도착했다. 행진하는 내내 바로 뒤에서 걷던 70대 할머니의 등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괜찮다’고 말할 뿐이었다. 대열이 광장으로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 양쪽으로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 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해 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이한열 열사의 대형영정만이 앞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도 현수막을 접었다. 현규 씨가 일단 담배를 한 대 피우자고 했다.

 덕수궁 정문 앞으로 빠져나왔다. 같이 현수막을 들고 온 임영준 씨도 같이 담배를 피웠다. 그들은 담뱃재를 빈 담뱃갑에다 털었다. 영준 씨는 “괜한 것 가지고 책잡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그의 가방에는 법정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가 꽂혀 있었다. “학생들 맞는 거 보고 열 받아서 계속 나오게 됐어요. 며칠 째 밤을 새고 있습니다.”

 그는 일산에서 작은 경비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경찰들 진짜 너무합니다. 보도되는 것보다 실제로 맞은 사람들 더 많을 거예요. 저도 몇 번 맞았어요. 경찰특공대에는 제 친구들도 있는데... 정말...” 담배를 다 피우고 다른 ‘아고리언’들이 있는 광화문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현규 씨가 멀찍이 앞서 가자 영준 씨가 말했다. “저 분도 따님이 집회에 참가했다가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열 받으신 걸 거예요.”

 영준 씨는 아고라에서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어렸고 특히 여성들이 많다는 점에 놀랐다고 했다. 자주 밤을 새는 이유도 경찰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줄 젊은 남자들이 몇 명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 잘 됐네요. 같이 밤 새워요.” 밤차로 제천에 내려가야 한다는 말에 그는 못내 섭섭해 했다. “거제도에서 오신 분도 밤 새우고 그러는데 뭘...”

 시청역 앞에서 광화문까지 가는데 40분이 넘게 걸렸다. 빽빽이 들어찬 촛불 틈을 비집고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핫도그와 어묵, 촛불을 파는 차량이 통행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현규 씨가 말했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트럭 위의 아주머니는 구부정한 등을 보인 채 새 어묵을 묵묵히 꼬치에 꽂고 있었다. 다른 종류의 차량도 눈에 띄었다. 철도노조에서 설치해 놓은 무료 이동식 화장실이었다. 영준 씨는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겨우 동아일보 사옥 앞까지 갔다. 그 사이에 아고라 깃발을 보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 더 합류했다. 중학교 3학년인 박현아 씨는 수줍음을 많이 탔다. 쇠고기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들에도 화가 나서 나왔는지 묻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친구의 티셔츠 한가운데에는 대운하 반대 스티커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현아 씨는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몰랐고 오늘이 6·10항쟁 기념일인지도 몰랐다. 다음 주에 있을 기말고사를 준비해야 하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영준 씨가 놀렸다.

 잠시 앉아서 쉬고 있는 사이 누군가 과자를 주고 갔다. 과자를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물대포 얘기가 나오자 현규 씨가 말했다. “이한열이 죽은 건 정면으로 쏜 최루탄이 머리 근처에서 터졌기 때문이야. 원래는 공중으로 대고 쏴야 하는데 말이야.” 옆에 있던 영준 씨가 맞장구쳤다. “물대포도 마찬가지죠. 원래는 15도 정도 높여서 쏴야 하는데 직격으로 쏘니까 사람들이 다치는 거죠.”

 그때 훤칠한 키에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자 두 명이 다가왔다. 현규 씨에게 물으니 이미 여러 번 함께 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바로 앞에 쌓아둔 스티로폼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았다. “저걸 쌓아가지고 광화문 앞을 막은 컨테이너 박스를 넘어가려고 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평화적으로 하면 될 텐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아고라’에서 나왔다는 혐의를 받으면 우리 모두가 비난을 듣잖아요. 아고라에 한 번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몰아가자면 아주 쉬운 일이죠.”

 사람들이 잠시 술렁였다. 개인적 행동은 통제할 수 없다, 어차피 아고리언은 누구나 될 수 있고 통제 가능한 집단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도 막을 건 막아야 한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다. 즉석 토론이었다. 일단 장범 씨가 ‘대책위’에 전화해 경고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대책위라는 말에 아고라를 조직하는 어떤 단체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현규 씨가 답했다. “광우병 대책위라고 집회를 조직하는 집단은 아니고 그저 우리 같은 사람들 도와주는 ‘도우미’인 셈이죠.”

 잠시나마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누가 만든 깃발인지도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모인 그들이었다. ‘아고라’ 이름이 붙은 스티커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이건 누가 만든 거지? 우리가 만든 건 아닌데’ 하며 신기해 할 정도였다. 그들은 쉰 목소리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쳐대는 사람들을 보고 ‘시끄럽고, 듣기 싫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기도 했다.

 잠깐의 휴식 뒤 아고리언들은 행진을 시작했다. 처음 출발했던 신촌 방향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밤 같이 새자고 몇 번씩이나 말했던 영준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행렬 앞에 서 있는 그의 등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영준 씨는 두말없이 악수를 청했다. 잘 가라고, 좋은 기자가 되라고 말했다. 대열을 빠져나오면서 현아 씨와 친구들을 보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몰랐지만 그들은 한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가요풍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들 옆에는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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