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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편집실
[정부수립 60주년]1부-현대사 60년의 주인공들:(1)노동자
- 변태섭
- 조회 : 16116
- 등록일 : 2008-09-17
| [정부수립 60주년]1부-현대사 60년의 주인공들:(1)노동자 | |||||||||||||||||
| 입력: 2008년 08월 03일 19:03:35 | |||||||||||||||||
| ㆍ건설노동자 황태순씨 ㆍ“부두·사우디…70평생 뼈빠진 막노동” 황태순씨(73)는 왼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뇌졸중의 후유증이다. 허리는 다소 굽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린 구릿빛, 양쪽볼은 움푹 파여 있었다. 첫 대면에서 받은 인상만으로도 칠십 평생 그가 살아온 인생 행로가 보였다. 그를 지난달 22일 대구 방촌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났다. 농사일에 염증이 나 1968년 32세에 건설현장 막노동을 시작한 이래 2005년 70세까지 평생을 쉬지 않고 노동을 한 대가로 그가 얻은 것은 여전한 가난과 뇌졸중이다.
그가 막노동을 하며 살아온 38년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81억달러에서 1조달러에 육박하고 국가는 경제규모 세계 13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초고속 성장은 국가의 몫이지 황씨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늘 고단했다. ● 지게 소리만 들어도 넌더리 난다
국민학교를 마친 황씨에게는 “지게 소리만 들어도 넌더리가 날 정도”의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벼, 조, 목화, 메밀, 감, 담배, 황기 등 곡식과 약초를 가리지 않고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농사가 싫어 공장일을 할까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공장에 갈라캐도 전쟁 직후라 공장이 어딨노. 부산에 고무신 공장이 있었지만 기술도 없고, 빽도 없어서 안되데. 그래가 어쩔 수 없이 농사 쭉 짓다가 군대 갔지.” ● 돈 써서 들어간 막노동 현장
군위에서 자식 셋을 낳자 농사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렵다고 느꼈다. 고향을 떠났다. 68년 친척 누님이 살던 대구 신암동에 월세를 얻어 이사했다. 동대구 역사 건물이 지어지던 시기다. 그곳에서 그가 평생해야 하는 막노동을 시작했다. 근로조건은 열악했고 임금은 형편없었다. “하루 일당을 얼마나 받았나카면 250원이거든. 그때 쌀 한 섬에 2만5000원 했으이 벌어도 버는 기 아니었지. 새벽 4시30분에 가야 삽이라도 잡지 아니면 일 못하는기라.” 동대구역 공사장에서 자갈, 모래, 시멘트를 섞고 전봇대 세우는 일을 보조하면서 약 1년간 일한 뒤 70년 대한통운에 입사했다. “거 들어갈 때 소 한 마리 팔아가 드갔다카이. 보리쌀 한 섬에 5000원 할 때 내가 5만원 주고 들어갔으이 보리쌀 10섬이다 10섬.” 돈을 주고 들어갔지만 노동 강도는 동대구역 공사장에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황씨는 대구역에서 철도 운송 화물을 하역하며 시멘트를 짊어지고 날랐다. “정말 중노동이라. 시멘트 한 포대에 42㎏이거든. 그런데 열차 한 대에서 내리는 시멘트가 1250포대거든. 우리 집채만 하다카이. 그걸 고마 한 사람한테 맡기는기라. 첨 가서 메면 어깨 벗겨져 가지고 피도 나고 참말로 힘들었데이.” 일은 힘들었지만 가끔은 직원들과 부부동반 나들이도 나갔다. “한번은 회사 계모임으로 공원에 간 적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 각하, 국사에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말하는 구관조가 있어서 참말로 신기했는기라.”
“중정하면 벌벌 기던 시절 아이가. 부정 저지른 놈은 가마이 놓아두고 나만 괴롭히는 거야.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는 말 죄다 거짓이더라.” 숱한 외압에도 불구, 결국 황씨는 소송에서 이겨 분회장을 몰아냈지만 자신을 따르던 50여명의 직원들이 해고될 것을 우려해 자진해서 회사에 사표를 냈다. ● 창살 없는 감옥 사우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78년에는 중동 취업 바람이 한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잘 살아보세’라는 기치 아래 건설회사와 물류회사들에 중동 진출을 권유했다. “우야든동 애들 공부는 시킬라고 사우디로 가기로 결심한 거 아이가.” 사우디 가서 일하는 것도 돈을 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월급이 12만원이었지만 사우디 가면 40만~50만원 벌으이 30만~40만원의 돈을 쓰고 서로 갈라캤다.” 하지만 대한통운에 근무할 때 작업 실력을 인정 받아 돈을 쓰지 않고 사우디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사우디 담맘항으로 몸이 옮겨갔지만 하는 일은 똑같은 하역일이었다. 바뀐 게 있다면 열차가 아닌 배에서 짐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로조건은 더 나빠졌다. “시멘트 싣고 온 배의 화물칸 깊이가 12m란 말야. 근데 만지다보면 미끄러져가 고마 시멘트가 그 밑으로 떨어지면서 거기 빠지는 거야. 그라마 다시 내리가서 꺼내 와야지 우야노. 날은 덥긴 덥제. 50㎏ 시멘트 포대 꺼낼라카이 엄청나이 힘들었다. 담맘 부두가 배 대는데 길이로 보자면 12㎞는 된다. 왔다 갔다 하는데 얼마나 힘드노. 또 그 작업이 위험한 게 시멘트를 보통 50포대씩 올리는데 한 조에 둘이 들어가 하거든. 그렇게 올리는데 앞조에서 어디 걸리면 고마 50포대가 한꺼번에 다 떨어지는기라. 이건 뭐 폭탄 한가지라. 그래가 떨어지는 시멘트 포대에 맞아 죽은 사람도 많아.”
그는 두 번 다시 사우디에는 안 가겠다고 한다. “사우디에서 돈 벌어봤자 번 표시가 안 나더라고. 사우디 4번 갔다 온 친구는 마누라가 바람이 나 돈 다 때리 먹어 뿌고 아파트도 다 팔아먹고 그랬지. 참 그땐 그런 게 많았어.” ● 70세까지 멈추지 않은 노동 81년 사우디에서 귀국했다. 그 사이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영구집권할 것 같았던 박 대통령은 암살당했고, 그 자리를 또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이 차지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은 늘 그게 그거였다. 여전히 생계의 벼랑 끝에서 살아가야 했다. 농기구 회사, 섬유 회사, 가구 회사 등을 전전했다. 그에게는 박정희·전두환보다 97년 외환위기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2005년 뇌졸중에 걸린 이후 일을 그만뒀다. 생활은 여전히 어렵지만, 더이상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그가 막노동을 시작할 무렵 9만원에서 지난해 207배 증가한 1863만원이 됐지만,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뇌졸중에 걸린 자신을 탓하고 있다. 한때 국가는 그를 산업전사로 호명하며 희생을 요구했다. 그러나 산업전쟁에서 부상하고 병들고 늙은 그에게 국가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보상은커녕 국가는 경제대국이 되어야 한다며, 다시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 가난하고 늙은 전사의 말을 들어보자. “산업전사는 뭐꼬. 그냥 먹고 살기 바쁘니께 한 거지. 나라가 잘살게 됐다니께 다행이지만 내는 이 모양 이꼴 아이가.”
<글 선근형·사진 김정근기자 ssun@kyunghyang.com> <취재협조 |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 ■ 노동자 황태순 연보 1935년(1세) 경북 군위군 효령면 출생 1951년(15세) 국민학교 졸업. 농사일 시작 1958년(22세) 군 입대. 1961년(25세) 전역. 동향의 손천봉씨와 결혼 1968년(32세) 동대구역 신축 공사장에서 막노동 1970년(34세) 대한통운 취직, 대구역 열차 화물하역 담당 1979년(43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하역작업 인부 1981년(45세) 귀국. 농기구·섬유·가구 회사 등 근무 1997년(61세) 외환위기로 회사 부도. 6개월치 월급 떼임 2002년(67세) 호텔 경비원, 자동차 부품회사 근무 2005년(70세)~현재 뇌졸중. 일 손 놓음. | |||||||||||||||||







